○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기억의 집

그·림·자 2007. 8. 19. 12:24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에 누워 "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 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살아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는 소리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지만, 잠시 눈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 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물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최승자 시집『기억의 집』(1989) Autumn Tears - The Broken D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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