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우리 슬픔의 물음표와 느낌표

그·림·자 2007. 8. 2. 20:31

1 나는 문을 연다 이미 열려진 문은 문이 아니다 자정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닫힌 문 비틀고 주리틀어도 열리지 않는 문을 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나는 똑똑히 본다 나는 안다 내가 안간힘쓰며 밀어붙이는 문 반대편에 네가 있다는 것을, 너도 몸부림치며 문 연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 같은 힘으로 문 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모른다 도대체 너와 나 누가 갇혀 있는가를 2 착한 영혼들이 잠자는 지도를 펼치면 먼 대륙으로부터 불어와 흉몽 키우는 유행성 인플루엔자의 바람이 한창이다 머리맡에 놓인 우윳빛 두통약과 텅 빈 가계부 도무지 탄불 꺼져 쩍쩍 얼어터진 구들장을 오히려 덥혀주는 저 식솔들의 가난한 등뼈가 아슬아슬한데 잠자코 있으라며 입 틀어막는 새로 두점, 새로 세점의 시계추 웅크린 이력들을 싣고 비장한 꿈을 달리는 밤기차의 굉음이 드세다 3 꿈의 갈피에 곱게 끼워둔 채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색바랜 고독은 더 이상 고독이 아니라 고름이다 세월의 가랑잎 날려 몇 개는 발밑에 으깨지고 더러는 종종걸음으로 막차를 타기 위해 흩어지는데 늦도록 공원 의자에 앉아 고름을 짜는 자들이여 너는 말했지, 꿈을 갖고 산다는 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냐고 얼결에 맞장구치던 나는 정말 어이없어 웃었지만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예각 찬란하게 유유한 경멸을 입꼬리에 흘리는 별똥별 두엇 놓치지 않을 테다 가령 네가 가볍게 나를 칠 때마다 나는 세게 아팠다는 것을 4 코피처럼 터지는 어둠 속으로 한 사내가 걸어간다 주민등록증과 사무실의 출근부와 입사원서를 빛내주던 학력과 몇 장의 자격증과 생년월일과 연대보증인의 서명으로 확실한 신원을 가진 사내가 불확실한 어둠 속으로 어둠의 긴 담을 끼고 걸어간다 어둠은 그가 어둡다고 느끼기 이전부터 이미 어둠이었을까 중얼거리는 순간, 사내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서치라이트가 급히 정지명령을 내린다 그 불빛에 얼핏 금이 간 뒷골목 春畵들이 음탕하게 웃는다 5 오후 내내 채광창을 통해 쏟아지던 햇살을 비수처럼, 아니 비애처럼 가슴에 품고 내가 내 어둠의 막사를 탈영하여 떠도는 거리 自淨力 잃은 선거구호만 난무하는 거리에 공사판 하루 삶의 집대성인 전표 한 장이 찢겨 쓰러지고 붉은 줄로 교정된 꿈을 꾸며 간직한 몇 줌의 햇살은 어둠에 마구 겁탈당하면서도 킬킬거렸다 죽은 活字 뒹구는 석간의 심인광고에서 즐겁게 읽은 모두 용서할테니 돌아오라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휘파람 불며 정작 내 돌아갈 곳은 없어 夢遊하는 거리 눕고 싶어 다만 눕고 싶어 누울 자리 고르면 그곳은 여지없는 棺 속 생전에 故人의 삶을 추모하며 노란 국화 한 송이씩 던지고 총총히 사라지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얼굴들 6 마른 장작비가 내렸다 후려패듯이 그때마다 꽃잎들은 자지러지며 기도했다 주여 이곳의 시험은 너무 어렵습니다 거두어 가소서 여린 종아리를 관능적으로 드러낸 채 매맞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낡은 교회당 돌층계 위에 생각이 저물어 이끼 피듯 우리가 늙어갈 때 최후의 만찬을 치르고 떠난 메시아는 부활을 잊는다 손톱 밑에 까맣게 세월이 낀다 7 오늘 우리를 연꽃으로 피우려 스스로 진흙탕에 뒹구시는 오늘 우리를 영원케 하려 스스로 순간인 듯 머무시는 오늘 우리를 곧게 키우려 스스로 곁가지되어 잘리시는 오늘 우리를 떠나 보내려 스스로 배경으로 손 흔드시는 어머니, 저 술 안 취했어요 당신은 아직도 처녀인데 처녀처럼 예쁜데, 대처 떠돌수록 자꾸 눈에 밟히는데 밟히면 마구 짓밟는데, 저는 아직 성공 못했는데 술국 끓이랴? 어머니는 등 두드려주며 다만 혀 차실 뿐 토사물 속에 국수가락처럼 불어터진 새벽 8 풀꽃들을 치장하는 이슬 몇 방울 기다려 긴 밤을 떨며 견딘 곤충들의 생애는 행복했을 것이다 내일을 날기 위해 오늘을 잠자는 고치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 알 것이다 겨드랑이 밑에서 서서히 돋아나는 날개의 희미한 비비적거림 아, 그런 황홀한 통증은 어디에나 있다 서리 맞은 낙엽 뒤집어보면 거기 얼마나 따뜻한 지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지 솟아올라 유리창 뿌옇게 흐려놓는지 허나 유리창 바깥의 세상은 과연 따뜻하게 밝아오고 있었을까? 있었겠지! 우리는 인정한다 고개는 좌우로 완강히 흔들면서 강연호 시집『비단길』(1994) Pink Floyd - A Saucerful of Secr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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