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묘지 20 - 조그마한 주검 새가 죽었다. 참새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하늘을 조금 찢어 내어 덮어 주자. 누가, 더운 입김을 조금만 쐬어 주었으면. 새벽 산길을 오르다 보면 샘물가에 미리 와서 종종걸음으로 걸어다니는 흔히 지나쳐 버리거나 잊어버리기 일쑤인 사람에게 기억되는 싶어하는 새. 새가 죽었다. 하느님..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8.12.01
설일(雪日) 흰색이 세상을 청첩했구나 바람이 눈을 쓸고 있네요 쓸다가 쓸다가 하도 고요해져서 두 손이 하염없어졌네요 조정권 유고시집『삶이라는 책』(파란) Olafur Arnalds - Happiness Does Not Wait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8.11.29
노란 한숨 개나리 노란 한숨 저 바람이 스치며 간다 노란 한숨이 아직은 작게 내려오는 봄빛 아래에서 바람이 스친, 아린 자리를 쓰다듬으며 허공에 머물러 있다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허수경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8.11.29
별리 은행잎 노란 물 든다 청춘, 어느 날 우리처럼 한 사랑이 또 다른 사랑에게 고하는 이별 같은 소식 애태우며 바래다 작은 바람이라도 일면 와르르 몰락하겠다 몰락은 흩어지며 사라지는 일 마지막 순간까지 너를 저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 쓰지만 이별의 그늘은 줄다리기 승자차럼 힘의 반..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8.11.13
자살자(自殺者)를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말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말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말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말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7.09.15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6.05.02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Woman with Dead Child, 1903 : Kathe Kollwitz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5.04.15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솟아 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 없음을 가능케 한 우..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4.04.30
우는 때 꽃 핀 아침 달 밝은 저녁 비오는 밤 그때가 가장 님 그리운 때라고 남들은 말합니다 나도 같은 고요한 때로는 그때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말하고 노는 때에 더 울게 됩니다 님 있는 여러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여 좋은 말을 합니다마는 나는 그들의 위로하는 ..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4.04.30
이름짓지 못한 시 지금 나라초상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상감마마 승하가 아닙니다 두 눈에 넣어둔 내 새끼들의 꽃 생명이 초록생명이 어이없이 몰살된 바다 밑창에 모두 머리 박고 있어야 할 국민상 중입니다 세상에 세상에 이 찬란한 아이들 생때같은 새끼들을 앞세우고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몹쓸 살 판.. ○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2014.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