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바다/•··내안의 바다

사람들은 왜 분노를 잃었을까?

그·림·자 2005. 9. 27. 00:03
사람들은 왜 분노를 잃었을까? 이 의문이 나를 분노케 한다. 나는 분노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왜 나를 별난 놈으로 보려 하는 걸까? 나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원죄의식이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걸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게 묻는다. 너 군사독재정권 시절엔 뭐했니? 나는 여기서 무너진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너 왜 그땐 침묵하다가 세상 좋아지니까 설치니? 너 무슨 꿍꿍이 속이 있지?"그러면 영원히 침묵해야 하냐?" 는 게 나의 항변이지만 너무 무력하다. 한번 침묵했으면 영원히 침묵하는게 좋다는 일관성의 미덕은 의외로 우리의 일상적 삶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둘째, 공범의식이다. 내가 분노를 터뜨리는 주요 대상은 수구 기득권 세력이다. 그들이 힘을 쓰는 영역이 좀 넓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 영역 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기득권 세력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호구지책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 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분노는 그 내용이 아무리 옳아도 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 람 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 셋째, 냉소주의다. 이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이 한 몸 제대로 건사하기도 힘들다. 공적인 분노? 그건 너무 사치스럽다. 그건 그헐게 힘이 남아 돌아가는 사람이나 할 짓이다. 아니면 공적인 분노를 빙자하여 개인적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이나 할 짓이다. 그래 니 말 다 옳아. 니가 잘 났다니까. 잘해보라구. 공적인 분노? 아이고 그럴 힘 있으면 아껴뒀다가 자동차 바꾸는 데나 쓸란다. 넷째, 보신주의다. 이건 주로 사회 참여를 열심히 하는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공적인 분노가 있릉 수 있다. 문제는 표출 방법이다. 사회 비판을 하되 무난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실명비판은 절대 금기다. 추상적으로 싸잡아서 두루뭉실하게 비판해야 한다. 실명 비판은 천박하고 상스럽다고 꾸짖어야 한다. 나의 비판이 결코 보신주의적 비판이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네 가지 이유가 명백한 의도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문화로 정착됐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잃었다'는 표현을 쓴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문화가 바뀔 때까지는 나는 별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문화가 바뀌는 중이라는 희 망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최근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시민둔동단체들이 표출한 공적인 분노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나는 그걸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 건 '집단적으로, 크게'하는 분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게'하는 분노가 우리 모두의 일상적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어느 신문의 주필이 정말 파렴치한 칼럼을 써대면 그 순간 분노해 그 신문을 끊어버리는, 그런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크게'하는 분노는 그런 진정한 의미의 분노가 아니다. 다수의 합의에 의한, 전략적인 분노다. 그래서 시민운동단체들은 그간 언론에 대해선 이루 말할 수 없이 비굴한 태도을 취해 왔다. 나는 시민운동단체들의 그런 행태에 분노한다. 내가 별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미 선언한 바와 같이, [조선일보]에 글을 써대는 '좌파'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을 계속 공격할 것이다.(...) 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국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탐욕스러운 매명주의가 사회개혁의 가장 큼 장애 가운데 ㅎ나라고 생각한다. 그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엉뚱한 이론과 명분을 만들어내는게 더 큰 문제다. 언론을 몰가치적인 도구로만 보는, 언론플 레이의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그들의 언론관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의 여론은 늘 기존 언로를 장악한 자들의 관리와 조작의 대상이 되어 왜 곡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내로라 하는 석학들은 자신의 전공이 언론학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_ '집단적으로, 크게'하는 분노보다 '개인적으로, 작게'하는 분노가 우리 모두의 일상적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벌이고자 하는 싸움은 내가 지게끔 되어 있는 싸움이다. 그 싸움의 와중에서 나는 망가지게 돼 있다. 그래도 나는 분노한다. 나의 가슴, 나의 지성과 양심은 '분노하는 네가 옳다'고 말해주고 있으니 말이다_ 강준만『사람들은 왜 분노를 잃었을까』(인물과 사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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