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이탈한 자가 문득

그·림·자 2016. 5. 2. 23:51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이탈을 꿈꾸어 보지 않은 자 누구인가.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보기를 꿈꾸어 보지 않은 자 누구인가.
그러나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오는가. 자신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태양도 뭇별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고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곳만 알 뿐인데,하물며 원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어찌 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그러나 나는 보았
다. 어두운 밤하늘에 재빠르게 빛을 뿜으며 홀연히 사라지는 유성(流星)별을. 텅 빈 채 짧게 빛나는 한 획. 이탈한 자의 덜미
에 후광으로 눈부신 장엄한 자재(自在)로움을. <박주택·시인, 2008. 8>
낙오하지 않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경쟁에서 밀려나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비애를 무엇으로 달래야 할까.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 온 적거지는 바로 나 자신이다. 파산하고 패가한 뒤에야 자신을 만나다니!
그동안 적조했던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통해 ‘나’는 밤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별을 바라본다. 놓지않으려고 발버둥치던 줄
을 툭, 놓아버린 별은 그야말로 인생 막장까지 가서 볼장 다 본 ‘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자신이 동의한 바 없는 질서에 파
산신고를 낸 뒤 추락하는 별은 붙박이별들이 누릴 수 없는 자유를 누리는 섬광이 된다.  그래서 ‘똥’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
운 ‘별똥별’이다. 포기라면 그것은 눈부신 포기고, 체념이라면 그것은 열정적 체념이다. 사실, 우리들의 천체엔 “가는곳만가
고 아는 것만 알 뿐”인 뜨뜻미지근한 삶으로부터 이탈한 뒤 스스로 하나의 궤도가 되어 귀환한 항성들이 드물지 않다.
청춘에 파산신고를 내고 낙향하는 벗과 함께 소주병을 기울이며 바라보던 서울 하늘에도 별이 떠 있었던가.두눈에 맺혀 있
다 떨어지던 그 한 방울이 요즘은 나를 위로한다. 내려와서 쉬었다 가라고, 평상에 누워 별똥이 스칠 때 어린날처럼 소원이
라도 함께 빌어보자고. <손택수·시인, 2008. 8>
김중식 시집『황금빛 모서리』(문지사, 1993)

 Los In Reflection - Pompon Finkelstein
그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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