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밤이 지나고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략) 오. 나의 벗들이여!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자는 말한다. "수치심, 수치심,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수치심, 그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라고. 나의 고결한 사람은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쓴다. 그는 그 대신에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도록 마음을 쓴다. 참으로, 나는 연민의 정이란 것을 베풂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저 자비롭다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도 수치심을 모른다. (……)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희들이 받아들일 때는, 그것이 주는 자에게는 특별한 영예가 되도록 받는 일에 인색하라!" 나 베풀 것이 없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하는바이다. 그러나 나는 베푸는 자다. 나는 벗이 벗에게 베풀듯 즐겨 베푼다. 낮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내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를 직접 따도 좋다. 손수 따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덜 부끄러울 것이다. 다만 거지만은 남김없이 몰아내라! 참으로 그들에게는 주어도 화가 나고 주지 않아도 화가 난다. (중략)
2.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니체는 인간이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너무 자주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다윈 역시『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이라는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중략) 니체나 다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수치심이 인간의 근본적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자존감이나 자긍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것이 손상되었을 때 수치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수치심은 외적 권위에 대한 고려에서 비롯되는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긍심과 명예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 그 결핍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수치심은 자기 고양을 욕망하는 고결한 존재(der Edle)가 갖는 감정이다. 고결한 자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역량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며, 그 역량을 미처 사용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 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역량, 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 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상식적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그러나 수전 손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식적으로 접근 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고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동정심 많고 선량한 얼굴을 한 정치인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어이없어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이 참사가 고통사고에 비견될 수 있다면, 모두들 자신이 음주운전으로 타인을 죽인 운전자라도 되는 듯 자책하는데 유독 정치인들만이 길 가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행인처럼 굴고 있는 듯하다. 목격한 것도 신의 뜻이니 모처럼 좋은 일 좀 해보자는 것일까? 그러니 사고 이후 정치인들이 내놓는 주된 수습안들이 모두 연민과 시혜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엾은 희생자의 가족들을 위해 적절한 보상금을 책정하고 생존자에게 특혜를 베풀어서 착한 정치인으로 남고 싶은 거다. 배를 운항한 사람들과 구조를 맡았던 사람들과 상황을 보도했던 사람들과 그 모든 것을 총괄해야 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뽑아놓고 감시하고 항의해야 했던 우리와…… 모든 이들의 잘못이 들통나버렸다. 수치심으로 얼굴 붉히며 참사를 가져온 겹겹의 잘못에 대해 오래오래 따져 물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누군가 지독한 수치심으로 괴로워해야 할 순간에 그저 울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라도 베풀듯이 눈물을 보였다는 시혜의 관점이 아니라면, '용서해주세요'도 아니고 '잘못했습니다.'도 아닌 '도와주세요'라는 그토록 당당한 선거 구호가 등장할 수는 없다. 그런 이들이 이제 노란 리본을 보면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동정이나 연민은 베푸는 사람의 마음이지 받는 이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정해줬는데도 자꾸 사실을 규명해야겠다니 이제는 피곤도 하고 화도 치밀것이다. 정치가 있어야 할 곳에 연민과 시혜의 언설이 난무하는 사회가 어째서 뻔뻔스러운 사회인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백 일 넘는 시간 동안 참담한 상황을 보며, 서글프게도 니체의 저 구절들이 이해되었다.
3. 당신은 우리를 천사로 만들어주었다.
(중략) 이번 지방선거와 이어진 보궐선거에서 '도와주세요'나 '살려주세요'라는 구호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오고간다. 지독하게 퇴행적인 선거 구호라는 논평들이 지배적이었다. 저들은 침몰하는 배 안에서 그토록 살려달라고 외쳤던 아이들의 간절한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저런 구호가 전략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구호 모두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선거 결과를 구호의 효과로만 볼수는 없겠지만, 참사의 책임을 묻는 심판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구호들이 부정적 효과를 내지 않고 선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참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언설들이 성공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편만한 시혜의 에토스이다. '도와주세요'와 '살려주세요'는 그런 에토스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언설들이다. 그 언설들을 통해 선거는 거룩함을 획득한다. 우리는 그저 한 표 행사할 뿐이지만 그 단순한 행위로 천사가 될 수 있다. 참사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한 흘리는 한 여인을 돕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또다른 여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위대한 천사 말이다. 싸우고 항의라고 따져 물어야 하는 순간에 임재하여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천사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소거한다. (중략)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진은영作)
계간 문학동네 2014 가을호 특집『세월호를 생각하다』중에서_Lila Downs - Self-Portrait With Hair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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