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부끄럽지도 슬프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물의 뒤, 詩集과 커피잔 뒤에도
막막히 누워 있는 그것만 바라봅니다.
정처 없던 것이 자리잡고
머리골 속에서 쓸쓸함이 중력을 갖고
쓸쓸함이 눈을 갖게 되고
그래서 볼 수 있습니다.
꽃의 웃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밤의 달빛이 무섭게 식은땀 흘리는 것을
굴뚝과 벽,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
그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발바닥까지
어떻게 내 목구멍까지 적시는지를
눈 꼭감아 뒤로 눈이 트일 때까지,
죽음을 향해 시야가 파고들 때까지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내 속에서 커가는 이 치명적인 꿈을.
그러면서 나의 늑골도 하염없이 깊어지구요.
최승자 시집『이 시대의 사랑』(문지, 1981)
Dustin O' Halloran - Form Is D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