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바다/•··시인의 바다

서랍들

그·림·자 2009. 5. 21. 23:59
그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서랍을 가졌었나? 나는 수 없이 많은 책상들을 전전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서랍들 속에서 발견되는 옛애인들이 웃음짓는 빛 바랜 사진들.. 오, 그 서랍들 속에 감추었던 꿈은 몇 개인가 제 날짜에 참석했던 민방위 교육훈련 불참을 단호하게 경고하는 재소집 통지서가 날아들고 내 생애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안동에서 주차 위반 벌칙금 납부 독촉장이 날아든다 (혹시 독도에서 속도 위반 벌칙금이 날아온다면 어떻게 할까) 착오와 착오의 날들 사이로 빗발이 뿌리고.. 가랑잎 내리고.. 진눈깨비가 치고.. 세월은 덧없는 연애처럼 흐른다 내 위생적인 첫사랑의 기억은 아득히 멀어져가고 흠집 많은 책상 서랍을 열면 시간의 풍화 작용을 견디지 못하고 마모되는 기억들이 가득하다 영수증들 편지들 못쓰게 된 볼펜 몇 자루 누군가의 명함들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들 그 속에 뒤엉킨 무수한 세월이 함께 딸려나온다 어떤 삶도 전멸하는 법은 없다 서랍 속에 남은 몇 조각 꿈의 흔적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장석주 시집『크고 헐렁헐렁한 바지』(1996) Govi - HavanaSun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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